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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호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로 보는
인간의 두 얼굴

생각의 밸런스
글.김형중(공연칼럼니스트)

인간이 가진 두 얼굴, 이성과 감성.
특히나 이성적인 혹은 감성적인 사람은 있어도 어느 한 부분만 온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만약 이성만이 인간이 갖춰야 할 ‘선’이고, 감성을 없애려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결과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일인칭 지킬 시점으로 등장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는 «보물섬»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L. 스티븐슨(1850~1894)의 고전(1886)이 원작이다. 인간성에 내재된 선과 악의 갈등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한 이 소설은 지금도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으며, ‘지킬/하이드’는 이중인격의 대명사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하고 레슬리 브리커스가 노랫말과 극본을 쓴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는 1990년 미국 휴스턴에서 초연된 뒤 1997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1,543회 공연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어 2004년, 국내 라이선스 초연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조승우가 공연사에 남을 ‘역대급’ 열연을 펼치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뮤지컬은 스티븐슨의 고전과 살짝 다르다. 원작은 헨리 지킬의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미스터리 형식이다. 반면 뮤지컬에선 지킬을 주인공으로 끄집어내고,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1941)에서 시도한 멜로 라인을 응용해 원작에 없는 여성 캐릭터들을 창조했다. 지킬의 지고지순한 약혼녀 엠마, 지킬에게서 따뜻함을 느끼는 클럽 아가씨 루시가 그들이다. 이렇게 지킬을 중심으로 삼각관계의 로맨틱 멜로를 추가해 선과 악뿐 아니라 사랑과 희생 등 인간성의 다양한 영역을 조명한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가

주인공 헨리 지킬은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다. 그는 부친의 정신질환이 인간의 심성에 깃든 악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심성에 있는 선과 악을 분리해낸다면, 그래서 악을 통제한다면 부친의 병도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스티븐슨의 발상은 흥미롭다. 치료제를 발명해 암세포나 바이러스를 제거하듯, 악 또한 약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논리다. 종교나 윤리학에서 다루었던 선악의 문제를 ‘당돌하게도’ 과학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원작이 출간된 19세기는 과학에 대한 신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였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발흥한 합리주의, 즉 이성주의가 세상을 이끌었고, 자연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못 할 게 없어 보였다.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지구속 여행», «신비의 섬» 등을 보면, 이런 과학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가 오롯이 담겨 있다.

지킬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선과 악을 분리해낼 수 있는 시약을 만들어낸다. 제조에 성공했으니 이제 약의 효능을 검증해야 할 차례. 하지만 임상실험의 대상이 마땅치 않다. 지킬은 병원 이사회에 나가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위원들은 그를 조롱할 뿐이다. 화가난 지킬은 고뇌를 거듭하다 결단을 내린다.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이때 비장하게 팔뚝에 주사를 꽂으며 부르는 곡이 유명한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이다.

이성중심주의의 부작용, 하이드

지킬의 실험은 일단 성공한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선과 악은 분리된다. 하지만 곧 부작용이 발생한다. 분리된 악이 너무 강하다.

마침내 그의 육체를 지배하게 된 악은 스스로를 ‘에드워드 하이드’라고 이름 짓는다. 하이드는 곧 이사회 위원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온 런던 시내는 공포에 떨게 된다.

지킬의 의도는 선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스티븐슨은 쥘 베른의 순진한 낙관주의와 달리 과학만능주의가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준엄하게 경고한다. 마치 곧 이은 20세기에 도래할 이성중심주의의 파국을 예견이나 한 듯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이성을 통한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성중심주의는 그 전제에 주종의 권력관계가 깔려 있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서양과 동양 등의 이항대립은 전자가 우월적 지위에서 후자를 계몽한다는 방식을 되풀이했다. 대상화된 객체는 소외되고, 파괴되고, 희생을 강요당했다. 이런 면에서 하이드는 이성중심주의가 낳은 부작용의 괴물이자 강제로 타자(他者)화된 객체의 ‘역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의 비정상적인 독주를 막는 감성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또 다른 존재인 하이드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에 지킬은 괴로워한다.

엠마와의 결혼식 날, 지킬은 자신이 서서히 하이드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엠마에게 행패를 부리려는 순간,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말한다.

“헨리, 당신이란 거 알아요. 당신은 날 아프게 하지 않아요”라고.

정신이 번쩍 든 지킬은 남은 힘을 모아 친구 어터슨의 지팡이를 뺏어 자신을 찌른다. 자신을 없앰으로써 하이드를 처치한 것이다.

지킬의 결자해지(結者解之)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킬은 원래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부친에 대한 존경, 약혼녀 엠마에 대한 사랑, 루시에 대한 연민 등 따스한 휴머니즘의 소유자였다. 연구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의 이성이 가속 페달을 밟아 파국을 피할 순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 엠마의 사랑 덕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생존하고 발전해온 과정에서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성이 독주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 <지킬앤하이드>는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성은 감성과 균형을 이룰 때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함을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 엠마의 변치 않는 헌신이 지킬의 이성을 제자리에 갖다 놓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