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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10호

고창 책마을해리 배경
다시 책과
가까워지는 시간
고창 책마을해리
CU 핫플레이스
글. 손은경 사진. 김지원

책을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영상이라는 자극에 잠시 넘어갔을 뿐이다. 실컷 놀다 이제는 다시 책이 주는 진득함이 그리워졌다. 소홀했던 마음을 돌리기로 했다. 다른 누구의 방해 없이 책과 나, 오직 우리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고창 책마을해리 바깥 풍경

오직 책을 보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차락’하는 소리는
지금 우리가 침묵을 넘어 짙은 소통을 하고 있음을 대신 알려주었다.

고요함이 깃든 곳

책을 위한 장소는 많다. 도서관과 서점은 기본이고, 분위기 좋은 북카페도 널렸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마니아 독자를 위한 독립서점도 찾아가려고 마음먹으면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요즘이다. 하지만 기어이, 고창 시내에서도 차로 30분이나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책마을해리를 우리의 목적지로 삼은 건 단 하나다. 오직 책만을 위한 곳이라는 것, 그래서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방해받지 않기 위해선 고립도 필요한 법이다.

책마을해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곳은 입구 역할을 하는 카페 겸 서점인 ‘책방해리’다. 이곳에서는 입장료 대신 한 권의 책을 구입하도록 되어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책으로 연결되어 책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책 세상은 입장료도 책이다. 신중하게 골라 구입한 책을 손에 쥐었다. 오늘 하루 손잡고 다닐 짝꿍이 생겼다.

서점 밖을 나서면 초록빛을 한껏 품은 너른 뜰이 나온다. 한때는 학교 운동장이었던 곳, ‘책뜰’이다. 폐교에서 책테마공간으로의 마법 같은 변신을 하면서 운동장은 햇살과 함께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장소가 되었다. 마음 내키는 어느 곳이든 편하게 책을 보라며 곳곳에 벤치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 ‘책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각프레임 형태에 서로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형태의 벤치다. 짝꿍에게 눈을 고정하고 천천히 활자의 흐름을 따라갔다. 오직 책을 보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차락’하는 소리는 지금 우리가 침묵을 넘어 짙은 소통을 하고 있음을 대신 알려주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고요다.

책은 세월을 품는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책도 서가에 꽂혀있는 동안 세월을 안고 산다. 책마을해리의 ‘책숲시간의숲’이 그러하다. 책뜰을 지나 계단길을 올라 중앙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면 책으로 가득한 통로가 있다. 이 통로를 지나 책숲시간의숲 문을 여는 순간, 벽면을 가득 채운,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수의 책들이 주는 압도감이 쏟아졌다.

30,000여 권의 책. 대형 서점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숫자이지만 서점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을 품고 있다. 어쩌면 오래된 것이 주는 시간, 세월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 몇 차례의 태풍을 겪으며 드러난 천장의 나무 구조,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 요즘 느낌과는 거리가 먼 기본 디자인 책장. 이 모든 것이 시간의 숲을 이루었다. 숲에서 나무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나무와 땅이 주는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책숲에서는 책을 펼치지 않았다. 편안한 의자에 힘을 빼고 앉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책에 담긴 지식도 중요하지만 영상이 주는 시각과 청각 자극에서 벗어나 책이 주는 무성을 느끼며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고전책으로만 꾸민 공간도 매력적이다. 오래된 피아노와 금박으로 장식한 고전전집, 흔들의자, 낡은 책상이 한순간에 2024년에서 80년대 초 시절로 잡아 끌었다. 책상 위에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원고지가 있었다. 고전소설 속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필사해 보라는 뜻에서 두었다고 한다. ‘여섯 번째 별은 먼저 별보다 열 배나 더 큰 별이었다. 그 별에는 엄청나게 큰 책을 쓰고 있는 노신사가 살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간 누군가는 소설 〈어린왕자〉의 이 문구가 좋았나보다.

어린왕자 문구를 적은 노트
책마을해리 내부 복도
안녕 바오 내 친구 어린 바오밥 나무에게 책 사진
책마을해리 건물 옆 외관
책뜰 안에 있는 책 모양 벤치
책뜰 안에 있는 책 모양 벤치
책이 주는 마법을 느끼며

폐교에서 재탄생한 책마을답게 마을 곳곳에는 들러야 하는 곳도 많다. 그림책과 어린이·청소년책으로 꾸며진 버들눈도서관, 1500년 역사의 고창한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한지공방, 오로지 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책감옥, 나무 위에 지어진 동학평화도서관, 책 관련 전시회를 열고 있는 갤러리해리 등 마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린다. 책마을해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책 아이템이 주는 눈요기거리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 읽는 사람의 모습에서 따 온 북엔드, 벽에 걸린 하얀 의자, 어린왕자 화분, 책 모양을 한 벤치와 그곳에 새겨진 문구. 책으로도 이토록 다양한 재미를 줄 수 있거늘. 책이라는 존재를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건 아닌지, 이제는 영상의 시대라는 핑계를 대며 감각의 균형을 잃었던 건 아닌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책마을해리의 ‘촌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책마을해리의 ‘해리’는 ‘해리면’의 해리도 있지만 판타지소설 〈해리포터〉의 해리의 뜻도 있어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책으로 이루는 마법 같은 즐거움, 변화를 느꼈으면 하거든요.”

세상이 변하더라도 책이 주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다고 해서 책과 비교하며 폄하할 필요도 없다. 책과의 데이트를 통해 얻은 배움이다. 활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책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책과 나,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책마을해리

  •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성산길 88
  • 입장료 대신 책 구매
  • 월·금·토·일 10:00~18:00
  • 063-563-9173

책이라는 존재를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건 아닌지,
이제는 영상의 시대라는 핑계를 대며 감각의 균형을 잃었던 건 아닌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동학평화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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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엉이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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